본관은 아주(鵝州). 초명은 응개(應漑). 자는 길래(吉來), 호는 용애(龍崖). 충청북도 청주 출생. 신심(申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반씨(光州潘氏)로 반봉익(潘鳳翼)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홀로된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일찍이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과거에는 끝내 오르지 못하고, 그 뒤 뜻을 달리하여 학문연구에 전심, 역학과 성리학에 깊이 들어갔으며 천문·역수에도 밝았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되자 이에 항변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써서 대궐 앞에 나아가 시위하는 등, 스승의 신원을 위하여 힘썼으며, 명의 신종을 제사지내자는 유림의 운동에 앞장섰다. 만년에는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로 『용애문집(龍崖文集)』 4권 1책이 있다.
용애문집(龍崖文集)
검암서원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병암2리 215-2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31호로 지정되었다.
1871년(고종8)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없어졌다가 1958년에 유림에서 다시 세우고 1985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후에, 용애(龍崖) 신응태(申應泰, 1643~1728)를 추가하고, 매년 음력 3월 중정일(重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서원의 출입문은 솟을대문으로‘검암서원(檢巖書院)’이라는 현판을 달았고, 또한 자연석과 시멘트로 담장을 두른 후에 기와를 얹었다. 내부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았으며 통간 콘크리트 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두었다. 내부 건물의 상부에는 ‘충효사(忠孝祠)’라는 편액을 걸어 서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조헌(趙憲, 1544∼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이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경기도 김포 출생났으며 조황(趙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세우(趙世佑)이고,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김경백(金敬伯), 우(李瑀), 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송준길(宋浚吉)의 경연일기(經筵日記)는 1639년(인조17) 9월부터 1684(숙종10) 5월까지 45년간의 『승정원일기』에서 저자가 경연에 참여하여 언급한 기사나 관심이 있는 것을 발췌한 일기이다.
*한일휴(韓日休, 1542∼1614)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경일(慶逸)이며, 호는 월포정(月浦亭)이다. 할아버지는 한영년(韓永年), 아버지는 한기(韓琦)이고, 형 한일제(韓日躋), 아우 한일신(韓日신), 아들은 한준(韓峻)이다.
1567(명종22)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宣祖)가 피난을 가자 단검(短劍)을 잡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용만(龍灣)에 이르러 선조의 어가를 따랐다. 선조가 이에 감격하여 장원 별좌(掌苑別坐)를 제수하였다. 품계(品階)는 선무랑(宣務郞)이고, 관직은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병암리에 있는 검암서원(儉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연최적(延最積, 1663∼1693)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이다. 청주 출신이며,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연택로(延宅老)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2년(숙종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배속되었다. 그 뒤 감찰에 올랐으나 시사(時事)의 급변으로 사직하고, 권상하(權尙夏)를 따라 학문을 닦았다.
1693년 숙종이 구언교(求言敎)를 내리자 이에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 입은 자들의 용서를 상소하여,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였다.
다음해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자 도승지(都承旨)의 벼슬을 받았다. 충신문(忠臣門)이 세워지고 그 뒤 이조판서겸양관대제학(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의 벼슬이 내려졌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